NO. 000030 · 비평

우연이 서사의 반감기를 거스를 때_룩백

평론가 수차미님의 움직그림에서의 첫 기사!!!

독서 기록 불러오는 중…

일본에서 벌어졌던 실제 살인 사건 중에 투구꽃 보험금 살인 사건이 있다. 사람이 죽은 일이니만큼 가볍게 다룰 수 없겠지만, 이 사건이 화제를 불러 모았던 건 그 살해 방식의 메커니즘 탓이었다. 범인인 카미야 치카라가 아내를 독살한 이 사건은 처음에 미제로 남을 뻔했는데, 시간적으로 보아 알리바이가 성립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사람이 죽을 정도의 약물 중에 이와 비슷한 기전으로 작용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의문을 가진 한 법의학자는 범인이 투구꽃과 복어독을 동시에 투여했고, 이 두 약제가 길항작용을 일으켰다는 점을 밝혀냈다. 약제들의 약리작용이 시간에 따라 진행되면서 서로를 상쇄했으며, 그중 반감기가 짧은 복어독이 먼저 해독됨에 따라 투구꽃의 독성이 인체에 작용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확보된 1시간 40여 분의 시간을 근거로 알리바이를 제시했던 범인은 이후 법의학자에 의해 약리작용을 이용한 트릭이 파훼되어 검거된다.

두 개의 성분이 공존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 균형이 깨어짐으로써 대상이 죽음에 이른다. 이 중간에 놓인 1시간 40여 분은 우리가 일반적인 영화의 러닝타임으로 여기는 시간이다. 전승민은 「스포일러 예절론에 반대하며」[1]라는 글에서 “삶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다양한 요인들이 서로 호흡하면서 삶을 상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영화가 끝나는 일은 어떠한 필연이라기보다 이미 투약된 약물들이 상호작용을 마치는 순간에 가깝다. 투약된 약물들의 종류를 알고 있다면, 대략 이 작용이 어느 순간 끝날지를 알 수 있으므로 영화가 끝나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 이처럼 무언가를 안다는 건 곧바로 시간의 결과를 체득한다는 말과 같지 않다. 인과적으로 안다는 말은 마주할 결말을 알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이미 서사에 투입된 요인들이 어느 순간에 작용할지를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스포일러는 감상을 망치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작품을 반복해서 관람하는 일이 있다. 이는 한 번으로는 작품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끼거나, 관람 특전 같은 것을 모으기 위함이기도 하다. 대개는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극장 상영의 관객 수 집계가 N회차 관람을 그대로 합산한다는 점을 알고 나면 생각보다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천만 영화는 있는 그대로 천만 명이 관람했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으며, 영화를 가족이나 지인 등과 함께 거듭 관람하는 일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바꾸어 말해 천만 영화의 등장은 영화를 다회차 관람하는 환경이나 문화가 조성되었음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 영화와 삶을 동일시할 경우 이러한 관람 환경은 영화의 감상 작용을 지연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볼수록 작품을 구성하는 음계와 악기들의 진입 타이밍에 익숙해지듯, 이 영화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요인을 구성하고 있으며 어느 사연에 길항작용을 하는지도 알 수 있다.

이처럼 길항작용에 대한 논의는 반복 관람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품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그 자신이 마주하는 결말을 저지하고자 다양한 경험으로 무장할 수 있다. 죽음을 예견해서 포기해버리는 게 아니라, 그와 동일한 경험으로 맞서며 이를 중화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작품에 몰입하는 일이 있는 그대로 작품에 삼켜져버리는 일이라면, 작품을 공부하는 일은 이에 맞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함인 셈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작품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관람을 반복하는 일과는 달리, 작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일반적인 관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처럼 논의를 진행하다 보면 스포일러에 대한 생각은 다음처럼 바뀔 수 있다. 이미 작품을 본 순간부터 운명처럼 맺어질 것을 알았다면, 스포일러를 접하는 일은 이를 내다보며 대응하는 게 아닐까.

하마구치 류스케는 2026년 열린 제64회 뉴욕영화제에서 아모스 보겔 강의를 진행했다. 이 강연의 주제를 오즈 야스지로와 우연으로 삼은 그는 <동경 이야기>와 <이른 봄>을 언급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이 순간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많은 변형들과 등을 맞대고 성립해 있습니다. 리허설이나 NG 테이크 같은 무수한 시행착오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실패할 가능성을 얼마든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우연이 화면 속에 성립했다면, 그것은 결코 재현 불가능한 특정 시공간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징표가 됩니다.”

이 말은 영화가 포착한 순간에 관해 카메라의 역할을 소명하는데, 이어지는 말에서 그 관점이 더욱 확장된다. “이들 우연에서 가능할 수 있던 다른 세계들이 비친다”고 표현하는 그에게, 이러한 발견은 자신이 대응했던 모든 노력들의 길항작용이 깨어지는 순간으로 인식된다. 단순히 하나의 순간에만 그칠 뿐이라면 이것은 그저 영화가 마주하는 결론처럼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신이 해오던 것들이 있는 그대로 동시에 시기를 맞추는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우연은 자신이 해오던 모든 예측을 중단하는 효과가 있으며 반대로 이들 약제의 반감기를 거슬러 오르게 한다. 예컨대 “삶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볼 때, 이들 우연은 삶의 처음 순간으로 돌아가며 인지의 영역을 바깥으로 확대한다. 영화가 우연을 받아들이는 매체일 수는 있다. 다만 이를 마주한 후에는 작품이 끝나버리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구성으로서 <룩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건 다양한 이유가 있다. 우선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세 개의 질료가 있으며, 이들이 모두 구성 면에서 대체현실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사연을 세 번 반복하는 쪽에 가까운 이 구성에서 우연은 후반부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요소다. 작품의 시작에서 후지노가 쿄모토의 방문 앞에 서서 그린 네 컷 만화가 우연히 방문 아래로 흘러 들어가고, 후반에서도 이게 반복된다. 바람이 불 일이 없는 실내임에도 종이를 손에서 떨어트리고, 이게 여러 번의 진자운동을 거쳐 방문 아래에 들어가버리는 일은 우연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순간은 영화가 이전의 전개를 저장해버리는 세이브포인트이며,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후반의 전개는 이에 따른 울림을 준다. 후지노가 그렸던 네 컷 만화는 쿄모토의 장례를 치른 후의 복도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하는데, 홧김에 이를 찢어버린 것이 우연찮게 방문 아래로 들어가버린다. 나오지 말라는 내용만을 남긴 채로 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라면 이 장면은 한 번 저장했던 세이브포인트를 되돌리려는 시도인 듯 보인다. 그 추측대로 이후의 전개는 두 사람이 유년기에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상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 상상은 쿄모토가 다시 그린 네 컷 만화가 바람에 날려 문 아래로 빠져나감으로써 종료된다. 앞서 후지노의 사례와는 달리, 활짝 열린 창문이 바람의 개입을 시사하고 있으므로 후지노의 것보다는 더욱 현실성 있는 대목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해, 이 개입은 작품이 내적으로 우연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보다 외부에서 처음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외부는 무엇이며, 누구의 시선이 자리 잡는 곳일까. 도입부에서 말한 두 약제의 길항작용처럼 이들 작품에서 현실은 작중 인물의 힘을 빌려 끊임없이 시작으로 돌아가려 한다. 무언가 시작되는 일을 주저하고, 망설이면서 도래하게 될 현실을 중화한다. 하지만 하마구치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그러했고 <룩백>의 후지노가 그러했듯, 우리는 문을 활짝 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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