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작품의 주요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영화 공개 당시 SNS를 뜨겁게 달궜던 〈월드 이즈 마인〉 무대 논란부터 짚어 보겠습니다. 《초(超) 가구야 공주!》 공개 전, 전설적인 보컬로이드(이하 ‘보카로’) 프로듀서 ryo가 작품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보카로 팬덤은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대 영상이 공개된 뒤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죠.
장난치듯 자유분방한 무대, 코믹한 연출, 그리고 개다리춤… SNS에서는 온갖 설전이 벌어졌고, 많은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됐죠. “보카로 문화에 대한 존중이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과연 그 ‘보카로 문화’는 누가 만든 것인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자면, ‘보컬로이드(VOCALOID)’는 야마하가 개발한 음성 합성 엔진, 그리고 그 엔진으로 만든 음성 라이브러리의 캐릭터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ryo, 유우유P, 악의P, 하치, DECO*27 같은 프로듀서들은 이미 존재하는 목소리와 캐릭터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덧붙인 2차 창작자에 가깝죠. 그런데 여러분은 ‘보컬로이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야마하가 만든 프로그램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니면 이 프로듀서들이 만든 〈멜트〉, 〈심해소녀〉, 〈악의 하인〉, 〈도넛 홀〉, 〈모니터링〉 같은 노래와 뮤직비디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서사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절대다수는 후자일 겁니다.
음성 합성 프로그램 위에 2차 창작자들이 덧붙인 이야기에 서브컬처 팬들은 열광했습니다. 이를바탕으로 3차, 4차 창작물이 생겨나며 팬덤은 넓어졌고, 그렇게 보카로는 무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끝없이 성장하는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즉 ‘보컬로이드’를 만든 것은 야마하지만, ‘보카로문화’를 만든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진심 전력으로 즐겼던 보카로 덕후들인 셈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제가 왜 제목에 ‘서브컬처에 대한 헌사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썼는지 어렴풋이 짐작하셨을
겁니다. 저는 《초(超) 가구야 공주!》가 ‘서브컬처’ 그 자체가 아니라, 서브컬처를 지금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서브컬처 덕후’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전 설화 등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오랫동안 창작자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감독이 메가폰을 내려놓고
작가가 펜을 꺾으면, 우리가 사랑하던 세계는 거기서 멈추죠.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뒷이야기는없느냐고 항의해도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작가가 죽인 셜록 홈즈를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되살려낸 ‘홈지언/셜로키언의 난’ 같은 예외도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서브컬처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 초반부, 가구야는 전래동화 〈가구야 공주〉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댑니다. 그러고는 자기 마음에 드는 해피엔딩을 다시 쓰겠다고 선언하죠. (이 시퀀스에서 가구야는 태블릿 PC를 ‘왼쪽’으로 스크롤합니다. 이 장면을 잘 기억해 주세요.)
원작의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멋대로 결말을 다시 쓴다? 기존 창작물의 세계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겠지만, 서브컬처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인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덕후’들이 글과 그림, 후기와 연성으로 공식과는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공식이 뭘 알아”라는 우스갯소리야말로 서브컬처 문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한마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의 엔딩을 살펴보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흔히 서구식 영상 문법에서 화면의 왼쪽은 과거, 오른쪽은 미래를 뜻합니다. 그래서 캐릭터가 오른쪽을 바라보거나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미래 지향적’ 행동의 상징으로 삼곤 하죠. 이 기준으로 《초(超) 가구야 공주!》의 페이크 엔딩 전후 장면을 분석하면 어떨까요? ‘모든 결말을 받아들이고 미래로 나아가야 했던 이로하가, 가구야와의 추억을 잊지 못해 과거로 회귀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여름 밤의 꿈에 취해 현실을 포기하고 만 고등학생의 가슴 아픈 비극으로 읽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일본은 이야기를 읽는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쪽입니다. 이 문법을 따르면 화면의 오른쪽이 과거이고, 왼쪽이 미래가 되죠. (가구야가 화면을 ‘왼쪽’으로 스크롤했던 장면, 기억하시나요?) 이를 토대로 같은 장면을 다시 분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구야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와야 했던 이로하가, 정해진 결말을 거부하고 가구야와 함께하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의 여행을 마친 뒤에도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 어설플지라도 나만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가기 위해 ‘왼쪽’으로 달려가는 사람. 네, 맞습니다. 바로 ‘서브컬처 덕후’입니다.
그런 면에서 《초(超) 가구야 공주!》의 진엔딩은 마치 아마추어의 2차 창작물 같기도 합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 작품의 진엔딩은 서사적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개는 중구난방이고, 타임슬립 설정은 작위적이기까지 하죠. 원하는 결말을 위해 억지로 설정을 기워 맞춘 것처럼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저는 바로 이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이야말로 서브컬처 팬덤에 바치는 거대한 헌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완성도는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내가 원하는 결말을 기어코 담아내고 말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서브컬처를 지금의 위상까지 끌어올린 서브컬처 덕후들의 집착이자 사랑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오프닝에서 점프하는 애니는 갓애니’라는 불문율에 화답하듯, 영화는 이로하, 가구야, 야치요 삼인방의 ‘키라라 점프’(일상계 애니메이션 오프닝의 단골 연출인 단체 점프 포즈)로 막을 내립니다. 동시에 ‘이이야기가 정말 여기서 끝일까?’라는 여지를 남기죠.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초(超) 가구야 공주!》에,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야기들에 어떤 ‘이야기’를 더하고 싶으신가요?